萍 - 저장소 ㅁ ~ ㅇ/역사 속 불교

25. 서의현 총무원장 사퇴 발표

浮萍草 2013. 7. 12. 07:00
    부패 척결 위한 사부대중 원력의 결실
    1994년 4월13일 대각사서 출·재가가 함께 이룬 개혁 폭력·궐석징계 등은 오점
    1994년 4월10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1994년 4월13일 오전 서울 종로 견지동 45번지 인근에 모인 스님들과 불자들은 환호성을 쏟아냈다.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마침내 사퇴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부패된 종단의 핵심권력을 도려내기 위한 사부대중들의 원력은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됐다. 불교계의 ‘6·10민주항쟁’으로 불리는 1994년 종단개혁은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의 3선 강행에서 비롯됐다. 당시 의현 스님은 그해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중임할 수 있다”는 종헌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3선 연임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1987년‘6·10민주항쟁’을 분기점으로 군사독재체제가 무너지고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불교계에도 민주적 종단 운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상황에서 의현 스님의 3선 강행은 거센 저항을 몰고 왔다. 이런 가운데 그해 1월 터진 상무대 비리사건은 종단 개혁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상무대 사건은 조계종 총무원장인 의현 스님이 정치권의 비자금을 돈세탁해주었다는 의혹이었다. 대구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건립을 위한 시주금이 다시 정치권의 대선자금으로 전달된 것으로 당시 불교계를 정치권과 결탁한 비리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연 불교계 내부에서는 자성과 함께 종단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실천승가회를 비롯해 선우도량,중앙승가대학생회,동국대 석림동문회,동국대 동림동문회 등 8개 승가단체는 3월23일 중앙승가대 에서‘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출범식을 갖고 종단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곤 3월26일 조계사에서 구종법회를 열어‘총무원장 3선반대,상무대 비리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의현 스님 측을 압박해 나갔다. 특히 스님들은 법회에 이어 3월28일부터 조계사에서 철야정진에 돌입했다. 의현 스님 측은 조직폭력배와 공권력을 동원해 범종추 스님들을 폭행하고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확산 됐다. 급기야 원로회의도 4월5일 종로 대각사에서 회의를 열고 서의현 총무원장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으며 4월10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 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나서면서 의현 스님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가운데 당시 종정 서암 스님은 4월9일 원로의원과 중진 스님 의견을 수렴해‘사부대중의 화합과 전국승려대회 개최금지,집행부와 범종추 대표로 구성된 수습대책위 구성’등을 담은 종정교시를 하달했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가 빠진 종정의 교시는 대중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4월10일 2500여명의 스님과 1000여명의 재가자들은 예정대로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었다. 이날 참석대중들은 서암 종정을 불신임하고 의현 총무원장의 체탈도첩을 결의했다. 결국 의현 스님은 13일 종로 대각사에서 총무원장을 사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조계종 개혁회의는 종단운영의 민주화 등 제도개선에 착수,조계종의 법과 제도를 새롭게 바꾸었다. 또 대대적인 ‘인적청산’을 단행해 종단개혁에 저항한 해종 행위자 143명에 대해 징계를 결의했다. 이 가운데 의현,보일,규필,원두,무성,종원,준제,진암,진경 스님 등 9명에 대해서는 체탈도첩을 확정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 징계를 진행해 여전히 법적논란이 일고 있다. 그로부터 20여년. 1994년 종단 개혁이 조계종의 행정과 교육, 포교 등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를 이끈 사건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개혁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태 등 비불교적 요소와 징계과정에서의 문제점 등은 개혁이 남긴 상처로 기록되고 있다.
    법보신문 Vol 1191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