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역사 속 불교

20. 김법린의 브뤼셀 연설

浮萍草 2013. 7. 2. 07:00
    1927년 2월10일 열린
    반제국주의대회에 참가
    일본 만행 세계에 알려
    해방후 교육행정가 활약
    김법린
    “일본 식민제국주의는 국제 정세상 가장 범죄적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이제 문명과 인류를 타락시키는 이 같은 범죄를 씻어내고 처벌할 때가 되었습니다.” 1927년 2월10일 벨기에 브뤼쉘에서 열린 ‘제1회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을 대표해 참석한 김법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유창한 불어 실력과 패기 넘치는 그의 연설은 이 자리에 참석한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일제가 조선과의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행정, 사법, 교육, 경제 등의 분야에서 진행한 식민지 정책의 실상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고, 이를 통해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한 그의 연설은 청중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조선에도 이처럼 세계정세와 제국주의의 음모를 정확히 분석할 정도의 안목을 가진 청년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비록‘일본으로부터 조선 독립 확보’ 등이 대회결의안에 포함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김법린의 뛰어난 연설은 국제사회에‘조선’이라는 나라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연설문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소재된 국제사회사연구소에 현재까지 소장돼 있을 정도다. 범산 김법린. 그는 일제시대 스님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불의에 맞섰던 투쟁가였으며,해방 이후 교육행정가 혹은 정치가로 활동하며 한국 근대사에 있어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었다.
    1899년 8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되던 해인 1913년 영천 은해사에서 강사로 활동하던 양혼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강원에서 수학하며 불교를 공부했다. 이후 부산 범어사가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정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고,졸업과 동시에 다시 서울에 있는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평생 삶의 기준으로 삼았던 만해 한용운 스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김법린은 중앙학림 학인들과 3·1운동을 준비했고, 부산으로 내려가 1만여 명이 동참한 불교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자 그는 급히 국경을 넘어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상해 남경대학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익히고 다시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랐다. 총칼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는 것도 중요한 독립운동이지만,학문을 익혀 조국의 독립을 돕는 것도 애국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리대학원에서 근세철학을 전공한 김법린은 1928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미련 없이 귀국길에 올라 조선불교의 혁신에 앞장섰다. 그는 만해 스님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만당을 결성하고, ‘불교’를 창간하는 등 저술과 강연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에 나섰다. 김법린의 활약은 해방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해방과 동시에 조계사에서 조선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재건의 기치를 내걸었다. 무엇보다 은둔적이고 독선적인 불교에서 벗어나 대사회적인 불교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제3대 문교부장관을 비롯해 민의원 등을 역임하며 각 방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 뒤에 다시 모교인 동국대 총장으로 돌아 온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학교행정을 선진화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던 그는 총장 부임 8개월만인 1964년 3월14일 돌연 심장마비로 세연을 마감했다. ‘정의의 칼날을 밟고 서기를 두려워말라’는 스승 만해 스님의 당부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았던 김법린. 그의 삶은 일제의 서슬퍼런 고문 속에서도 결코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스승의 삶을 꼭 빼닮은 듯하다.
    법보신문 Vol 1182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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