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태조 왕건 4 견훤의 귀순

浮萍草 2013. 4. 14. 07:00
    ‘삼한 통합’ 기치 내건 견훤, 人和 실패로 스러지다
    936년 견훤이 숨진 뒤 왕건이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세운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의 전경. 한을 품고 숨진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왕건의 뜻이 담긴 사찰이다. /중앙포토]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견훤은 9년 전인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생략) 이제 강약이 분명하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고려사』권1, 태조 10년(927) 12월)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처지로 뒤바뀌었을까. 935년(태조18) 3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게 반발해 동생 양검(良劍)·용검 (龍劍)과 난을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권력은 부자 사이도 갈라서게 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의 무덤.
    /사진 박종기
    ㆍ왕건, 견훤을 영웅으로 극진히 대접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북군(北軍)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남군(南軍·후백제군)의 군사 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의 경고는 이렇게도 무섭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략 요충지였는데 그곳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줄이야.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려사』권2 태조18년 6월조). 지난날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안긴 적장을 왕건은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영웅만이 영웅을 제대로 알고 대접하는 것일까.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머뭇거리던 왕건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반란 왕조였던 고려는 비로소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된다. 이듬해(936년) 2월,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순한다. 박영규는 지금의 순천에 근거지를 뒀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대표주자이자, 후백제 해군 주력부대의 사령관 격이었다. 귀순의 도미노 현상이라 할까.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인 후백제의 정변과 견훤·경순왕의 귀순은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백제왕 신검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뜨리고, 군사강국 후백제의 종말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후삼국 전쟁의 승부추가 고려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신라 국왕과 사위의 귀순에 고무된 것일까. 견훤은 귀순한 지 1년 만인 936년 6월, 글의 첫머리에 적은 대로 아들을 처단해달라고 왕건에게 간청한다. 같은 달 왕건은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린다. 태자 무(武:혜종)와 장군 박술희가 이끄는 군사 1만 명을 천안에 보내 전쟁을 준비케 한다. 영남과 호남의 갈림길에 위치한 천안은 공주를 거쳐 후백제 수도 전주를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길목이다. 하지만 석 달 뒤인 9월 견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천안에 도착한 왕건은 예상과 달리 추풍령을 넘어 일리천(一利川)으로 우회해 후백제군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기만전술을 택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지가 된 일리천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원촌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일대다. 왕건은 왜 이곳을 공격했을까. 왕건은 이곳에서 항복한 신라군을 고려군으로 보강하고 낙동강 물길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이동시켜 후백제의 측면과 후방을 치려 했다. 동시에 신검의 군대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기습적으로 신라 지역을 점령하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해로와 수로는 오늘의 철도나 고속도로와 같은 사람과 물류 이동의 중심 루트였다. 왕건이 8만7500명이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낙동강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전(水戰)에 일가견을 지닌 왕건에게 낙동강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통해 신라로 진격하려는 후백제군을 견제하고, 그 후방을 기습할 수 있는 전술적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이런 기습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일찌감치 왕건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자,문득 칼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군의 상공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후)백제 장군들은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말 앞에 항복해왔다.” (『고려사』권2 태조 19년(936) 9월조) ㆍ 고려·후백제 최후 결전, 일리천 전투
    하늘을 찌를 듯한 고려군의 사기와, 위축돼 싸우기를 포기한 후백제군의 모습을 사서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귀순, 신라의 항복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신검의 후백제군은 팔다리가 묶인 채 싸움판에 끌려 나온 형국 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3200여 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당황한 신검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돌려 자신들끼리 서로 찔렀다고 한다. 싸움의 승패는 이 일리천 전투에서 결정 났다. 왕건은 대장군 공훤(公萱)에게 명해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중군을 공격하게 했고 남은 고려군 3개 집단이 뒤를 따랐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黃山郡:논산)에 이르렀고 다시 탄령(炭嶺:완주군 고산면)을 넘어 마성(馬城:완주군 운주면 금당리)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신검은 동생·문무백관들과 함께 고려군에 항복한다. 왕건은 신검의 동생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죽이지만, 신검은 관작을 내리며 살려준다. 고려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악(元惡:악의 우두머리)이었지만 적국의 국왕에 대한 예우 때문일까. 이 때문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 며칠 만에 황산군에서 죽었다. 왕건은 이해 12월 견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개태사(開泰寺:논산시 연산면)란 사찰을 창건하고 직접 법회를 연 뒤 다음과 같은 글을 짓는다. “병신년(936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일리천 부근)에서 백제 군사와 진을 치고 한 번 부르짖으니 흉악하고 미친 무리가 와해 되었다. 두 번째 북소리에 반역의 무리들이 얼음 녹듯 사라져 개선과 환희의 노래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생략)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죄과를 뉘우쳐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귀순해 왔다. 나는 간사하고 악한 자를 제거하여, 기울어진 것을 일으키고 털끝 하나 풀 한 포기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과 산신령님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사원을 창건하게 했다. 절의 이름을 개태사라 한다. 원컨대 부처님의 위엄과 하느님의 힘으로 나라를 붙들어 주십시오.”(『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연산현 불우(佛宇) 개태사) ㆍ 견훤, 장남 살려두자 화병으로 사망?
    개태사는 고려의 전승을 기념한 사찰이자, 전쟁에 쓰러진 원혼을 달래려는 사찰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원한을 안고 죽은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것도 개태사 건립에 담긴 뜻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개태사를 지어 견훤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하려 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견훤이 서남해안(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이상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한평생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몸을 씻는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거친 야전을 누빈 왕건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웅이었다. 『궁예가 삼한 통합의 판세를 키워 모두에 삼한 통합의 꿈을 갖게 한 영웅 군주였다면 왕건은 일리천 전투의 승리로 마침내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영웅 군주였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군주였을까?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영웅 군주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고려군보다 두 배 강한 군사력과 전술만 믿었지 나라 안에서 흙벽 무너지는 무서움(土崩),즉 아들이 아비를 내쫓는 자중지란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다. 맹자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리 둘레의 성과 7리 둘레 바깥 성을 포위하여 가장 적절한 때인 천시를 택해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만 못하다 는 증거다. 성이 높고, 성을 에워싼 못이 깊고 무기가 강하고,곡식이 많은데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지리가 인화만 못한 증거다.”(『맹자』공손추 하) 즉, 전쟁에서 승패의 요처는 인화라는 것이다. 안으로 무너지는 흙벽을 단단하게 하는 인화가 지리와 천시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견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Sunday.joins Vol 제318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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