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의 여인불자들

8 고려 신혜왕후

浮萍草 2013. 5. 27. 07:00
    왕건의 첫 왕비…출가 후 13년 기다림 끝 결혼
    물 마시다 체할까 버들잎 띄운 인연 맺어 ‘유화부인’ 궁예 몰아내고 고려창건 결정적 역할…후사는 없어
    901년,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기 위해 경기도 정주 땅을 지나던 후고구려의 장수 왕건은 물오른 가지가 죽죽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한 아리따운 아가씨를 만났다. 그 아가씨에게 다가가 물 한 잔을 청하자 그녀는 물을 가득 담은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 하나를 띄워 흙먼지에 뒤덮인 왕건에게 건넸다. “물에 버드나무 잎을 띄운 연유는 무엇인가?” “목이 몹시 말라 보이길래,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습니다.” 범상치 않은 자태와 지혜에 반한 왕건은 그녀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고 그 지역 부호인 유천궁의 딸임을 알고는 그날 밤을 유천궁의 집에서 묵었다. 왕건이 자신의 딸에게 한 눈에 반했음을 안 유천궁은 딸에게 왕건의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후백제와의 전투를 위해 전장으로 곧 달려가야 했던 왕건은 그녀에게 후일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니 꼭 기다려달라는 약속을 남기고 정주를 떠났다. 그러나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여러 해가 거듭되어도 데리러 온다던 이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왕건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궁예가 북원의 양길을 죽이고 막 후고구려를 세웠을 시기였다. 당시 송악 호족의 아들인 왕건은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철원태수의 벼슬을 받았고,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지략과 패기를 겸비한 장수로 촉망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후삼국의 대립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절,하루 앞의 안위도 내다볼 수 없는 전장의 사내는 그녀를 선뜻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왕건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견훤의 군사를 내리 격파해 큰 공을 세웠고, 913년에는 시중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고 그녀와의 약속도 전쟁터의 흙먼지 속에 묻혀갔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914년 왕건은 또다시 정주 땅을 지나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13년 전 인연을 맺었던 여인을 떠올린 이 무심한 사내는 유천궁을 찾아가 딸의 소식을 물었다. “딸아이는 정절을 지키겠다며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왕건은 수소문해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사찰로 찾아갔다. 그리고 약속을 너무 늦게 지키게 되었음을 사과하고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 남자에 대한 순정을 지킨 이 여인은 이후 버들잎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여 유화(柳花)부인으로 불렸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만으로 보았을 때 유화부인은 매우 청순하고 지고지순한 한국여인의 전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버드나무처럼 나긋나긋하기만 한 여인이 아니었다.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유화부인의 또 다른 모습은 그녀가 고려 건국에 내조 차원을 넘어 결정적인 역할 한 주역이었음을 시사 하고 있다. 유화부인은 13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왕건을 따라 철원으로 올라갔다. 당시 궁예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의 화신임을 자처하면서 강력한 신권정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성정이 포악해져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신하들을 의심해 역적죄를 물어 죽이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그의 가신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주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918년 어느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궁예의 가신들이 왕건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궁예의 폐위를 비밀리 의논하기 위해 유화부인에게 말했다. “오는 길에 보니 동산에 참외가 아주 맛있게 익었던데, 그것을 좀 따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유화부인은 그 뜻을 알고 북문으로 나가는 척 하다가 휘장 뒤에 숨어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들었다. 장수들이 왕건에게 말하기를“지금 왕의 정치가 어긋나고 형벌이 과람하며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무찔러 죽이므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왕을 원수처럼 미워하니 걸주(桀紂,중국 고대 하와 은의 마지막 왕)의 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이니 청컨대 공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하였다. 혁명(革命), 즉 궁예 대신 왕건이 왕위에 올라 하늘의 명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정색을 하고 거절했다. “나는 충의를 다하려 하고 있다. 왕이 비록 포악하더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을 혁명이라 이르는데 나는 실상 덕이 없는 사람으로 어찌 감히 탕왕·무왕의 한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여러 장수들은 다시 간청했다. “때를 만나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우니,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나라 안의 백성으로 해독을 받는 자들은 밤낮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고 있으며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덕망이 공의 위에 있을 사람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공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공이 만약 이 말에 따르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 갑자기 휘장 뒤에서 유화부인이 불쑥 나오며 말했다.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대체함은 예로부터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발하겠사온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왕건에게 입히자,여러 장수들은 그를 부촉하여 바깥으로 나왔다.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태조를 앉히고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왕건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러자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궁예는 바위골짜기로 도망치다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르니, 유화부인은 고려 최초의 왕비 신혜왕후(神惠王后)가 되었다. 그녀가 왕건을 따라 상경했을 때 이미 왕건에게는 오씨 성을 가진 여인(후일 장화왕후)과 그의 소생인 아들 무(武, 후일 혜종)가 있었다. 왕건은 왕위에 오른 후 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스물아홉이나 되는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고 무려 25남 9녀를 두었다. 하지만 그 중에 신혜왕후의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평생토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이다. 왕비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특히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그녀는 태조에게 직접 갑옷을 입혀 왕위에 등극시킨 조강지처로 인정받았고 고려의 첫 번째 국모가 되었다. 신혜왕후는 후덕한 성품과 지혜로움으로 인해 태조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백성들과 신하들로부터 고려의 국모로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왕건의 스물아홉 명의 부인 중 태조와 함께 합장돼 현릉에 안장된 이 또한 신혜왕후였다. 어쩌면 신혜왕후의 13년 기다림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녀의 남자는 항상 전쟁에서 피바람을 몰고 다녔고 죽음을 늘 목전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곧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열 세 해가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스쳐 지나는 바람결 같은 사내의 말 한마디를 믿고 긴긴 세월을 기다린 것은 상식적으로는 어리석은 처신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왕건을 기다렸고 사랑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녀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정주 지역 호족의 딸인 그녀가 서른이 다 되도록 혼자 살기 위해서는 출가라는 방패막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삼단 같은 머리를 자르고 부처님 전에서 열 세 해를 무작정 기다렸다. 하지만 13년 인욕의 세월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그녀의 바보 같은 사랑은 왕건을 감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왕건에게 먼 훗날 그녀의 소식이 전해진 것도,그리고 그 이야기가 왕건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후대의 사가들이 왕건이 끝까지 사랑한 유일한 여인은 바로 신혜왕후였다고 전하는 것도 그녀의 사랑이 그만큼 지고지순했던 데 대한 감동의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Beopbo Vol 903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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