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삼국유사이야기

5. 신령한 돌

浮萍草 2013. 3. 29. 07:00
    지극한 신심 돌에 담으니 부처 아닌 것 없다 
    신령한 돌 이야기 모아 독립된 항목으로 기록 사찰의 창건 설화부터 법문 듣는 불제자까지 은 아무 말이 없다. 밟히고 차여도 말이 없다. 그래도 돌은 굳고 단단하며 변함이 없다. 돌도 의미가 있다. 물론 돌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사람이다. ‘ 삼국유사’에는 돌과 관련된 여러 설화가 전한다. 돌 이야기를 하나의 독립된 항목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는데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座石)조의 경우다. 무심한 돌이라도 그 돌에 불상을 새기면 그 돌은 부처님으로 변한다. 불상이 새겨진 돌은 이미 돌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귀의와 숭배를 받는 부처님인 것이다. 죽령(竹嶺) 동쪽 백 리 가량 되는 상주에 사불산(四佛山)이 있다. 이 산에 진평왕 9년(587)에 갑자기 큰 돌이 하나 나타났는데 사면이 한 길이나 되었다. 사방에 불상(佛像)이 새겨진 돌이 홍색의 비단에 싸인 채 하늘로부터 그 산꼭대기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긴 왕은 그곳에 행차하여 살펴보고 진심으로 공경하여 예배했다. 그리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다고 한다. 설화를 사실로 확인할 수야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산꼭대기에 솟아 있는 바위, 그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겨 사방불(四方佛)을 조성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불사였겠는가. 산꼭대기에 우뚝 선 사방불,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운석이 성스럽게 여겨졌듯이 이 돌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설화로 해서 더욱 성스럽게 여기게 되었을 것 이다. 누가 돌을 보고 무심하다고 하는가? 돌이야 무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돌은 견고하다. 그러기에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함없는 맹서를 단단한 돌에 새긴 경우도 있었다. 진평왕 34년(612)으로 추정되는 임신년 어느 여름날,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두 청년이 그들의 희망과 맹세를 돌에 새겨 남겼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고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서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忠道)를 지켜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맹서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3년 전인) 신미년 7월 22일에 맹서했다. 시경·상서·예기·춘추·좌전 등을 차례로 3년에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 이상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의 맹서다. 젊은이의 맹서가 새겨진 돌은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돌이다. 그러나 젊은 날의 굳은 맹서를 새긴 이 돌은 1400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남아서 신라 젊은이의 빛나는 희망과 맹서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는 신령한 땅이 네 곳에 있었다.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亐知山) 서쪽의 피전(皮田),북쪽의 금강산(金剛山) 등이 네 영지(靈地)였다.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서 모의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정도로 신령한 곳이었다. 네 영지 중 하나였던 남산의 오지암에서 진덕여왕(647~654) 때의 대신들인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 (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 등이 모여서 나라 일을 의논했던 적이 있다. 이처럼 신라의 대신들이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던 오지암은 역사적 명소였던 것이다. 신라 왕성에는 움직일 수 없는 돌 다섯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성중오부동석(城中五不動石)이라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내제석궁(內帝釋宮)의 섬돌이었다. 진평왕은 579년 8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왕이 내제석궁에 행차하면서 섬돌을 밟았을 때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은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에게 일렀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에게 보여라.” 이렇게 진평왕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고 그 힘은 곧 왕권과도 직결되었다. 11척의 신장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러기에 돌계단도 부러질 만했으리라. 일연은 이렇게 읊었다. “우리 임금님 이로부터 몸 무거우니 다음에는 쇠로 섬돌 만들어야 하리라.”

    무심한 돌멩이라도 의미 담으면 ‘법신’
    변함없는 돌의 속성 견고한 신심의 상징

    진평왕은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무려 53년이나. 안압지 남쪽 논 가운데 천주사의 부동석이라고 하는 큰 바위가 1945년 이전까지는 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압지 주변 정리 때에 없어졌다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신라 왕경에 전불시대(前佛時代)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고 전했는데 그 중의 하나였던 황룡사에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전하고 있어서 더욱 주목되었다. 가섭불은 과거불이다. 그리고 연좌(宴坐)란 좌선을 의미한다. 그 먼 옛날, 현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기도 전에, 가섭불은 이 돌에 앉아서 참선에 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라 땅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불교와 인연을 깊이 했던 불연국토(佛緣國土)라고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은 황룡사를 방문하여 가섭불연좌석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연좌석은 법당 뒤에 있었고 높이는 5~6자가 되고, 둘레는 세 아름 정도로 우뚝 서 있는데 위는 평평했다고 한다. 진흥왕 14년(553)에 황룡사가 창건된 뒤로 이 절은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이 연좌석에는 갈라진 곳이 있었는데 여기에 쇠를 붙여 보호하고 있었다. 그 후 몽고 병에 의해 황룡사가 불탈 때, 이 돌도 파묻혀 지면처럼 평평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돌아가자 그 장례는 유언에 따라 화장했고 남은 유해는 가루 내어 동해 푸른 바다에 뿌렸다. 이 사실은 “섶을 쌓아 장사지내고… 분골경진(粉骨鯨津)했다”는 문무왕비명의 구절로 알 수 있다 . 경진(鯨津)은 고래가 사는 큰 바다를 의미한다. 분골은 남은 유해를 가루낸다는 말이다. 아마도 남은 한 줌의 재는 저 동해 푸른 바다에 흩어서 장사지냈다는 뜻인 듯하다. 산골(散骨)의 장례의식은 동해 속의 큰 바위에서 행했는데 이 인연으로 해서 이 바위는 대왕암(大王岩)이라 불리게 되고, 그곳은 오래 기념할만한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고구려에도 신령스러운 돌이 있었다. 동부여왕 부루에게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後嗣)를 구하였는데,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대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했더니 거기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 이에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이렇게 곤연 가에 있던 큰 돌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감추고 있었고, 말은 이 돌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성에는 영석(靈石)이 하나 전해지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했는데 대개 옛날에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현(朝見)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돌을 타고 상제에게 오고갔다는 신화적 존재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돌은 조천석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 건의로 당나라에서 초청되어 온 도사(道士)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며 진압할 때 영석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백제에도 전설을 간직한 여러 돌이 있었다. 백제의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 후보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봉해서 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이 바위를 정사암이라고 했던 것이다. 또 사비수 언덕에 바위 하나가 있어 10여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왕이 흥왕사에 가서 부처님에게 예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이 돌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 졌으므로 돌석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비수 가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고기와 용을 낚았기에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곳이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했다. 훗날 타사암은 백제의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흔히 낙화암(落花巖)으로 불렸다. 승전(勝詮)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현수국사(賢首國師) 법장(法藏, 643~712)의 강석(講席)에서 화엄(華嚴)을 수업했다. 귀국할 때 법장의 여러 저서를 필사하여 법장의 서신과 함께 의상에게 전했다. 대개 의상이 귀국한 20년 후인 692년경이었다. 승전은 갈항사(葛項寺)를 짓고 돌멩이를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을 강의했다. 경북 금릉군 남면 오봉리 금오산 서쪽 기슭에 이 절터가 있다. 그 돌멩이 80여개는 고려후기까지도 전하고 있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이 돌 몇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 돌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했던 예는 중국에도 있었다. 동진의 도생(道生,355~434)은 평강(平江)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돌을 모아 청중으로 삼고 ‘열반경’을 강설하면서 천제(闡提)도 성불한다고 하자 여러 돌이 머리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도생의 일천재성불론(一闡提成佛論)은 유명하다. “티끌 하나 모기 한 마리도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원래 한 몸이다.” 의상의 가르침을 계승했던 8세기 중엽의 신림(神琳)의 법문이다.
    Beopbo Vol 1139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