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남쪽에서 꽃피운 북녘의 춤사위, 평양검무

浮萍草 2013. 3. 6. 14:09
    ㆍ평양 권번(券番)출신 예기*藝妓(와의만남
    양 이야기를 건네자 평양검무 이봉애 보유자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다. 
    남쪽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삭힐 수 가 없는 까닭이다.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평양에 있는 서문여고를 다녔는데 2학년 때 단짝 친구가 어느 날‘오늘 나하고 춤 배우 자!’이래. 
    그래서 따라간 것이 평양검무와 인연이 된 거예요.
    ”14세에 처음 만난 그의 스승은 빼어난 춤과 소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평양 권번(券番)출신의 예기(藝妓)김학선이다. 
    평양은 조선시대에 지방 감영(監營)이 설치되면서 교방청(敎坊廳)의 기녀들이 다양한 전통예술을 연행했던 곳이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전통예술의 산실이기도 했던 교방 청이 폐지되자 1914년에는 평양, 서울,대구,창원,광주 등지에 권번이 
    설치되어 교방에서 연희되던 예능이 권번 기녀를 통해 이어졌다.
    소녀 이봉애는 평양 권번에서 이름난 예인(藝人)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당시 40대였던 김학선이 이봉애의 소질을 알아본 덕에 그는 17세까지 3년간 검무를 비롯한 권번의 여러 가지 춤을 배웠다. 
    훗날 평양검무가 평생의업業이 되고,자신이 유일한 전승자가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못 했을 것이다.
    
    ㆍ북녘에서 단절된 전통 춤사위
    한국전쟁 이후로 북녘에서 자취를 감춘 평양검무. 그곳에서는 전통적 인 검무를 변형한 창작 칼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북한에서도 자취 를 감춘 평양검무의 유일한 전승자’라는 수식어는 오늘날 이봉애 보 유자를 따라다니는 직함이다. 월남하여 경기도 안양에 터전을 마련한 때는 그가 25세 되던 해였다. 삶의 무게로 인해 검무와 멀어졌다가 다시 검을 잡은 것은 평양검무를 배운 지 30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정연, 오복녀(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선생님을 만나서 서도창(西道唱)을 배우게 됐어요. 고향의 소리를 배우니까 자연스 럽게 어린 시절에 배운 검무가 떠올라서 다시 춤을 췄지요.” 꽃다운나 이의 소녀 이봉애는 어느덧 45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춤의 주인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몸이 기억하는 평양검무의 춤사위를 한 동작 한 동작 재연하였고, 1985년에는 평양검무보존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자신만이 평양검무의 유일한 전승자라는 사실이 몹시 안타 까웠던 까닭이다. 선뜻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마음 고생이 많았지만 현재는 100여 명의 전승자가 배출되었다며 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 는다.
    ㆍ남쪽에서 맥脈을 잇는 평양 검무
    평양검무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는 평양검무가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데에서 고생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행정안전부 이북5도(평안도,황해도,함경도) 위원회는 1998년부터 북한에서 전승된 미지정 무형문화유산을‘이북5도 무형문화재’ 라는 이름으로 지정해 왔는데,평양검무가 2001년에 지정된 것이다. 당시의 감격을 떠올리며 그가 평양검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양손에 든 칼을 밖으로 돌리다가 땅을 콕콕 찍는 동작이 특징이에요. 평안도식 피리 가락에 장구 장단을 넣고 볶은 타령(잦은 타령)에 맞춰서 춤을 춰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정기공연에 참석 하여 제자들을 격려할 만큼 평양검무 전승에 열정을 쏟아내는 이봉애 보유자. 그의 뒤를 이은 정은진 보유자를 비롯한 전승자들은 크고 작은 무대에서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줄 춤판을 벌이고,평양검무의 진수를 수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아흔을 넘긴 보유자의 온화한 눈빛이 손때 묻은 한 쌍의 검*劍(위로 내려앉는다.
    사진. 문화재청, 간송미술관
    글.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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