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결속과 조화에 바탕을 둔 전통 마을문화의 건강성

浮萍草 2013. 3. 1. 14:05
    ㆍ삶의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마을
    통사회의 민중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가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후기에 정기시定期市가 발달하면서 시장의 출입이 잦아지고 동관同官으로서 고을민속에 참여하는 기회가 늘어났지만 민중의 
    기본적인 생활 영역은 어디까지나 마을이었다. 
    마을은 하나의 작은 우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고 마을에 속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마을민속과 상호관계 속에서 사회화
    (socialization)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한편, 수많은 마을들을 포함하는 고을은 동관의식(同官意識)을 바탕으로 각 마을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체였다. 
    고을 중심지는 관아가 있는 읍치(邑治)로서 여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그 휘하의 관속,그리고 상공인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고을의 정치, 사회, 문화, 행정, 경제, 의례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분으로는 평민, 직업으로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각 마을의 민중들은 공간적으로는 고을에 속해 있었고 시간적으로는 그들의 
    선조가 창조한 문화전통에 속해 있었다. 
    신분상 양반과 아전층에 비해 낮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정한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은 상층의 문화를 일정
    하게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기존의 문화전통을 바탕으로 자기화함으로써 크게는 같지만 조금씩은 다른 마을민속을 창조하고 
    지켜나갈 수 있었다.
    ㆍ마을 민속문화의 특징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마을의 민속문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 자립적이고 자족적인 문화이다. 기본적인 문화 단위로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은 가족노동력을 기본으로 하되,보다 많은 노동력이 요구될 때는 이웃 간의 협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농사와 건축,의례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두레와 품앗이,그리고 계의 전통이 이와 같은 상부상조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마을 사회의 의사결정은 집을 단위로 호주戶主들이 모여 직접의사를 표현하는 풀뿌리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마을 일을 맡아 하는 동장과 유사 등의 소임과 연장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 연초에 개최하는 마을총회인 대동회 또는 촌계는 호주들이 모여 지난해의 마을살이를 결산하고 새해의 마을 운영을 설계하는 회의체로서 풀뿌리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둘째, 평등과 온정의 문화이다. 마을에서 모둠 살이를 하는 민중들은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 위에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대개가 가난한 경제적 지위의 평등 과 평민으로서 신분적 평등은 서로가 서로를 부축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편, 따뜻한 정은 사람과 사람,집과 집을 연결하는 끈으로서 정서적 연대를 통해 두레와 품앗이,계와 부조 등의 제도적인 연대장치 들을 더욱 활성화하는 촉매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정 나눔은 마을공동체가 이웃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정도로 친밀한 대면성對面性을 바탕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른 이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대면의 문화,서로를 부축하는 상조의 문화였기 때문에 길흉사에 십시일반의 정성이 함께할 수 있었고 오갈 데 없는 노인이나 부모 잃은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들까지를 감싸 안는 풀뿌리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셋째, 자연친화적인 문화이다. 농업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문화는 모든 유기체들이‘온 생명’이라는 보다 큰 생명단위 속에서 움직이면서 각자의 존재 의미를 지켜 나갔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생태계의 체계를 헝클어 놓지 않는 적정 기술 수준을 유지하며 적정하게 생산하고 적정하게 소비함으로써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모든 생물, 그리고 바위나 산처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에 바탕을 둔 만신신앙萬神信仰이나 자연을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파악하고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풍수사상은 공생적 자연관의 예로 볼 수 있다. 넷째, 예술의 생산과 소비가 동일한 지평 위에 이루어지는 문화이다. 설화와 민요,그리고 탈춤 등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민속문예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예술의 생산자 이자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예술이었다. 누구나 이야기 한 자루, 소리 한가락, 춤 한 사위 정도는 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자 소리꾼,춤꾼이었고 다른이의 이야기와 소리,춤을 즐기고 감평 할 줄 아는 애호가들이었다. 예술의 생산과 소비는 동일한 경험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졌고,그렇기에 모든 예술은 공동작의 성격을 일정하게 지니고 있었다. 물론 탁월한 이야기꾼과 소리꾼, 춤꾼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 역시 다른 이들의 눈높이에서 예술을 생산하였고 그들의 인준을 얻을 때만이 공동체의 예술자산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을 공동체의 예술 문화는 누구나 공감하면서 즐길 수 있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것이었다. 다섯째, 노동과 놀이가 균형을 이룬 문화이다. 인간의 시간은 크게 보아 일상과 비일상으로 나누어진다. 일상은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을 영위하는 시간인데 비해서 비일상은 일상을 훌쩍 뛰어 넘어서 신들과 만나 소통하고 공동체 단위의 축제를 벌이기도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전통사회의 명절들은 모두 비일상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일상의 시간은 그 성격에 따라 다시 생업시간, 생존시간, 여가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생업시간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업에 투여하는 시간이고 생존시간은 유기체로서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고 자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시간 등이며 여가시간은 생업시간과 생존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다.
    ㆍ일상과 비일상, 일과 놀이를 함께하는 마을 공동체
    이러한 시간구성 속에서 놀이가 벌어지는 시간은 비일상의 시간과 여가의 시간이다. 여가의 시간에는 보통의 놀이들이 벌어지고 비일상의 시간에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놀이 활동들을 펼친다. 예컨대 줄다리기, 차전, 석전, 횃불싸움,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가마싸움 등은 일상적인 여가놀이가 아니라 명절이라는 비일상의 시간에서만 벌어지는 축제의 놀이들인 것이다. 알다시피 전통사회는 농업을 본위로 하는 사회였고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체계가 아직 적응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농한기와 농번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논농사를 두고 볼 때 생업력 상으로 연중 쉬는 기간은 보리파종 이후 석 달 여의 농한기를 포함해 넉 달 반이나 된다. 여기에다 설, 대보름, 영등날,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중구, 시월고사와 묘사, 동지 등의 명절휴가를 합치면 무려 여섯 달 가까운 시간을 농업노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채전을 가꾸거나 농산물을 가공하고, 가사도구나 농사용구를 만들며, 퇴비를 마련하고 땔감을 장만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때 집중적으로 한다. 전통사회의 민중들은 이런 일들을‘여가 삼아 하는 소일거리’정도로 생각하였지 힘든 노동으로 보지 않았다. 이렇듯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힘든 농사와 잡역노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모를 심을 때나 김을 맬 때는 어김없이 풍물과 노래가 함께함으로써 노동의 고단함을 놀이의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 하였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목도질이나 땅을 다지는 망깨질에도 항상 선후창 형식의 민요가 동행함으로써 곧잘 일판을 놀이판으로 전환시키곤 하였다. 이렇듯 전통사회에서 일과 여가는 양과 질 양면에서 매우 균형 잡힌 상태로 상응하면서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하는 바탕으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문화 속에서 마을의 구성원들은 일상과 비일상을 함께하며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이루었다. 사진.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글. 한양명(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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