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부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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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날에는 고궁을 찾는다.
주인 없는 궁궐은 어느 계절에 거닐어도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눈이 흩날리는 겨울 궁궐의 깊은 적요(寂寥)는 떠나버린 왕조의 애절함을 끌어내는 듯해 더욱 감상적이다.
세월의 켜가 쌓인 기와 한 장, 석물 하나에도 하늘이 공평하게 손길을 보내 보듬는, 그런 눈 내리는 날의 궁궐이 나는 좋다.
몇 년 전 그날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하던 일도 멈추고 부리나케 짐을 꾸려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창덕궁을 택한 이유는 부용지(芙蓉池) 때문이었다.
연못에 쌓이는 눈은 궁궐의 겨울풍경 중에서도 백미다.
그렇지만 경복궁의 경회루나 향원지,창경궁의 춘당지는 규모가 꽤 큰 편이라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만큼 아늑한 감동을 주지는 못
한다.
내가 도착했을 때 궁궐 안엔 이미 하얀 눈과 회색 하늘, 붉은 기둥의 빛깔들이 조화롭게 채워져 있었다.
처마 아래에서 올려다본 알록달록한 단청이 군더더기처럼 애꿎게 느껴졌다.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 조촐한 인원이 그룹을 이뤄 후원에 들어섰다.
(창덕궁 후원은 개인 자유관람은 안 되고, 그룹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제한관람제가 시행되는 곳)
떨어지는 눈은 끊임없이 쌓이고 쌓여 세상 모든 것을 덮어나갈 기세였다.
부용지에 도착하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연못인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아, 부용지의 설경!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부용지는 네모나다. 그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옛 사람들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부용지에 채워진 물은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이다.
세조 때에는 그 부근에 우물이 4개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우물은 하나둘 사라졌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 연못을 조성하면서 부용지가 탄생했다.
우물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궁궐 안에서 샘이 솟았다는 의미는 매우 각별했던 것 같다.
지금도 연못가 한편에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서 있다.
비각 안 비석에는 우물 4개의 내력과 부용지 조성에 관한 사연이 새겨져 있다.
부용지 풍경에서는 자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의 전각들도 주인공으로 등장해 아름다움을 더한다.
위에서 보면 ‘열십(十)’자 모양의 특이한 형태를 가진 부용정(芙蓉亭)은 그 이름(부용=연꽃)답게 연꽃이 개화한 모양새다.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 정자 마루에 앉아 사계를 맞았을 임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앞 언덕으로 주합루(宙合樓)가 올려다보인다.
한때 규장각이 있었던 주합루는 정조가 세운 왕립 도서관이다.
1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2층에는 열람실이 있었다.
훗날 규모가 커진 규장각은 다른 곳으로 이전됐다.
부용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화당(暎花堂)도 빼놓을 수 없다.
부용지 동편에 서 있는 이 전각 앞마당에선 과거(科擧)의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최종 시험을 치렀다.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연못을 보며 급제를 향한 입신양명의 포부를 다잡았을까.
부용지 안에 녹아든 그 모든 사연은 해마다 따스한 날 연꽃으로 다시 피어오르리라.
제한된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워 눈 내리는 부용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천천히 부용지를 건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네모난 연못가에서 얼음 위로 사뿐 뛰어들어 유유히 눈 쌓인 연못 위를 거닐었다.
고양이가 대기 속에 쏟아낸 입김이 눈 때문에 촉촉해진 겨울 공기와 닿아 하얗게 변했다.
고양이의 검은 무늬는 하얀 눈과 대조되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연못 한가운데 놓인 동그란 섬을 스친 고양이는 다시 사뿐 연못가로 올라섰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고양이는 그 짧은 순간 천원지방 속의 땅과 하늘을 여행한 것이었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그 시간은 땅 끝에서 하늘을 관통했다 다시 땅 끝을 잇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고양이가 사라진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짙은 회색빛. 눈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부용지는 창덕궁에서 후원 관람권을 끊으면 해설사와 함께 단체 관람을 할 수 있다.
■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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