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 간직한 향나무-주목의 꿋꿋한 자태여
| ▲ 창덕궁 향나무(천연기념물 194호) 향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부정을 씻어 주는 정화 기능을 가졌다고 믿어졌다. 궁궐을 비롯해 사찰, 사대부의 집에도 많이 심었다. |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으뜸은 단연 최초의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이었던 복궁이다.
경복궁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처음으로 만든 가장 큰 궁궐이었다.
하지만 나는 경복궁의 웅장함에 감동하면서도 왠지 차가운 느낌을 받는다.
궁궐 조성의 원칙대로만 지어진, 지나치게 정돈된 모범생 같다고나 할까.
이에 비해 동궐 창덕궁은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궁궐 안 삼도(三道·임금과 문반,무반의 길)는 원래 정전까지 직선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창덕궁에선 두 번
이나 90도로 꺾어진다.
자연지세에 맞게 전각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전각들과 나무들에 쌓인 연륜도 따뜻한 느낌을 더한다.
창덕궁은 그 역사만큼 오랫동안 많은 노거수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다.
이번 회에는 필자가 좋아하는 창덕궁의 나무들을 담아봤다.
이 나무들은 특히 지난해부터 자유관람이 허용돼 더욱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는 내전,외전과 궐내각사(궁궐
안에 있던 관청들)에 있는 것들이다.
지면상 모두 넣을 수 없어 고심해 추려냈으니 실리지 못한 다른 나무들은 독자 여러분께서 꼭 직접 들러
확인해 보시길….
ㆍ태풍에 상처 입은 용
| ▲ 창덕궁 향나무의 예전 모습 태풍으로 높이 12m의 나무가 지상 4.5m 부근에서 부러졌다. 잘린 부분은 종묘제례나 궁중 행사 등에서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면, 앞으로 어떤 문화재가 사라질지 모르니 부지런히 둘러보시길! |
창덕궁에는 모두 4종 11그루의 천연기념물 나무가 살고 있다.
그중 회화나무 8그루는 이미 전에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700여 년을 넘게 살았다는 향나무(천연기념물 194호)를 소개한다.
이 나무는 창덕궁 서편 규장각 뒤에 있다.
향나무는 향을 풍기는 여러 식물 중 가장 유명하다.
나무를 태울 때 강한 향이 나는데, 그 때문에 일찍이 시신이 상할 때 생기는
냄새를 없애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향나무를 태우는 향은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도 믿어져 제례에도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향기를 뿜어내는 나무의 희생이 인간사에 많은 의미를
만들어준 셈이다.
향나무는 줄기의 생김새도 향기만큼 독특하다.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된 나이 많은 향나무들은 모두 저마다의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창덕궁 향나무의 가지들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무척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나무가 용틀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지난해 그 악명 높던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하던
날, 창덕궁 향나무의 가장 큰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려던 용은 이제 잠시 쉬어야만 할 것 같다.
전체적인 풍채는 그대로 남아있어 천연기념물 지정은 해제되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ㆍ나무를 누워 자라게 한 역사의 풍파
| ▲ 대조전(보물816호) 왕과 왕비의 침전엔 지붕에 용마루(지붕 맨 곡대기를 가로지르는 부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욍이 영 그 자체이므로 왕이 쉬는 것이 다른 용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란 설이 있다. |
창덕궁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에서 으뜸가는 건물이다.
다른 목조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수차례 화재로 인해 다시 지었다.
1917년에도 불이 나 건물이 타버렸는데,1920년 경복궁에 있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그대로 옮겨와 편액만 바꿔 달았다(일제에
의한 경복궁 파괴의 일환).
이곳은 순종이 1926년 53세에 승하하면서 조선왕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현장이며, 부속건물인 흥복헌에선 1910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순종이 강압에 의해 일본에 국권을 넘기기도 했다.
대조전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花階·층계 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거기에 꽃을 심은 것)가 장대하게 구성돼 있다.
‘ㄷ’자인 건물 가운데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이 정원엔 상록수인 소나무와 눈주목(누운주목), 괴석이 어우러져 사계절 그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한 궁 안에서 사철 거의 같은 풍경과 빛깔을 바라보는 궁궐 안주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실 옛 궁궐 생활은 감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임금은 일평생을 거의 궁궐 안에서만 살며, 금수강산 소식은 그저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다.
궁녀들도 한 번 입궐하면 죽기 직전에야 겨우 세상으로 나왔다.
그 이유가 궁궐 안에선 왕족만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니 더욱 서글프다.
그러고 보면 궁궐 안에서의 삶이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와 무엇이 다를까.
오히려 그들은 가고 나무들만 남은 걸 보면, 인간의 삶이 나무의 그것보다 덧없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다.
주목은 흔히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나무’라고 하는데 그만큼 살아서의 풍채도, 죽어서의 목재도 대단한 나무다.
궁궐에는 왕조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했던 듯 거대한 주목들이 많다.
주목 중엔 올곧이 자라는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원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낮고 비스듬하게 자라는 것도 있다.
이는 바람 많은 산꼭대기에 적응하기 위한 형태로, 이런 주목을 누운주목 또는 눈주목이라 구분해 부른다.
내전 깊숙한 곳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눈주목들은 분명 산정의 바람 이상으로 드센 역사의 풍파와 궁궐의 바람을 느꼈으리라.
ㆍ전쟁통에 타버린 왕의 초상화
| ▲ 창덕궁 측백나무 나무줄기가 비틀어지며 올라가는 느낌이 묘하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가 바로 대구 동구에 있는 측백나무숲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천연기념물 측백나무가 있지만 직접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
측백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들이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앞다퉈 서려고 할 때, 홀로 서쪽을 고집했다고 하는 나무다.
이 얘기는 측백나무 백(柏)자의 소리 때문에 나온 듯하다(오행: 동-청색, 서-백색, 남-적색, 북-흑색, 가운데-황색). 측백나무는
그 우직함 때문인지 예로부터 사당의 정원수나 무덤가에 많이 심어 조상을 지켜주는 나무로 쓰여 왔다.
창덕궁 측백나무의 나이는 대략 200∼300살로 추정된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보통 궁궐 전각의 앞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는데, 창덕궁 앞마당의 측백나무는 바로 뒤에
있는 선원전 때문에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선원전은 조선시대 어진, 즉 임금의 초상을 모시던 곳으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오늘 그림의 건물은 옛 선원전이다.
1920년 일제의 총독부가 창덕궁 북일영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만들면서 구(舊) 선원전이라 불리게 됐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두 선원전 모두 빈집으로 남아 있다.
신선원전으로 옮겨간 12국왕의 48어진은 모두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즈음 부산 유물보관창고에 불이 나 대부분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때 살아남은 어진은 영조의 것과 반 이상 타버린 철종의 것밖에 없었다.
추존왕인 익종(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 어진은 얼굴 부분이 타버렸다.
전주에 있던 태조 어진은 다행히(?) 함께 피란을 가지 못해 살아남았다.
‘궁궐지(宮闕志)’에는 선원전 주변에 드므(화재 대응을 위한 물통)를 네 개나 설치해 불이 났을 때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궁궐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가지고 나오는 물건이 바로 선원전의 어진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을 생각하며 멀쩡하게 남아 있는 선원전을 바라보면 안타까움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제 일이 없어진 선원전과 측백나무. 서로 돈독한 친분을 다지며 오랫동안 함께하기만을 바랐다.
■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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