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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사라진 과학계 별들 6 피임약의 아버지 ‘칼 제라시’

浮萍草 2015. 12. 28. 00:00
    난 세 해 마지막 과학카페에서 필자는‘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제목으로 그해 타계한 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뒤돌아봤습니다. 
    어느새 2015년도 며칠 남지 않았네요. 올 한 해도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지막 과학카페에서 이들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과학저널 ‘네이처’와‘사이언스’에 부고가 실린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
    네이처’에는 ‘부고(obituary)’‘사이언스’에는‘회고(retrospective)’라는 제목의 란에 주로 동료나 제자들이 글을 기고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올해 ‘네이처’에는 17건, ‘사이언스’에는 4건의 부고가 실렸습니다. 
    두 저널에서 함께 소개한 사람은 두 명입니다. 
    두 곳을 합치면 모두 19명이나 되네요. 이들을 사망한 순서에 따라 한 사람씩 소개합니다.
    
    ㆍ칼 제라시 (1923.10.29 ~ 2015. 1.30) 피임약의 아버지로 불렸던 화학자
    칼 제라시 - Chemical Heritage
    Foundation 제공
    1950년대 경구피임약을 최초로 개발한 화학자 칼 제라시(Carl Djerassi)는 1992년 펴낸 자서전 ‘The Pill, Pygmy Chimps and Degas' Horse’에서 피임약 개발의 뒷얘기를 자세히 썼다. 1995년에 ‘칼 제라시: 인생을 배팅하는 사람은 포커를 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지만 현재 절판된 상태다. 책을 읽어보면 제라시는 꽁생원 같은 전형적인 화학자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삶은 풍운아 같은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학술지 ‘네이처’ 2014년 11월 6일자에 제라시의 새로운 자서전 ‘In Retrospect: From the Pill to the Pen’에 대한 서평이 실렸다. 1923년생으로 무려 91세에 쓴 네 번째 자서전이라고 한다. 한 번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아는 출판사에 번역서를 제의해볼까 잠깐 생각해봤다. 그런데 서평이 실리고 3개월이 지난 ‘네이처’ 3월 5일자에 칼 제라시의 부고가 실렸다. 제라시가 올해 1월 30일 지병으로 타계했다는 것. 따라서 그가 죽기 3개월 전인 지난해 10월 출간된 자서전은 제라시의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제라시는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계 불가리아인 의사이고 어머니 역시 유태계 오스트리아인인 의사였다.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불가리아로 돌아갔고 제라시는 어머니와 살았다. 그런데 나치가 득세하면서 제라시 모자에게 위기가 닥쳐오자 1938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식적으로) 재혼했고 모자는 안전한 불가리아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계절수업을 들어가며 불과 19세에 케년대 화학과를 최우등을 졸업한 제라시는 스위스의 제약사 시바(CIBA)의 미국 지사에서 1년 일하다 회사 장학금으로 위스콘신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945년 학위를 받고 회사로 복귀해 항히스타민제 연구를 하던 제라시는 본인이 하고 싶은 스테로이드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되자(스위스 본사 연구소에서 하기 때문에) 실망하고 있었는데 이때 멕시코의 신텍스(Syntex)라는 작은 제약 회사로부터 연구소 부소장 제안을 받는다.
    이곳에서 마음껏 스테로이드 연구를 하면서 1951년 마침내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의 유사체인 노르에티스테론 9(norethisterone)을 합성하는데 성공한다. 이 약물은 생리불순과 불임치료제로 195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노르에티스테론의 배란억제기능은 생리불순뿐 아니라 피임에도 쓰일 수 있음을 의미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노르에티스테론 경구피임약은 1962년 ‘오르토 노붐(Ortho-Novum)’이라는 상표로 시장에 나왔다. 신텍스에서 스톡옵션을 받은 제라시는 스테로이드 제품으로 회사가 급성장하며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1960년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분광학, 인공지능을 도입한 유기합성 등 2002년 명예교수로 물러날 때까지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제라시는 신텍스의 주식을 판 돈으로 캘리포니아에 광활한 땅을 사들여 SMIP(Syntex Made It Possible(신텍스 덕분)의 약자)라고 불렀고, 폴 클레를 비롯해 유명 화가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렇게 폼 나게 살던 제라시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1978년 스물여덟인 딸 파멜라가 우울증으로 농장에서 자살한 것. 제라시는 이때의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농장을 예술촌으로 만들어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 한편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세 번째 결혼한 아내 다이앤 미들부룩은 스탠퍼드대 영문과 교수로 유명한 전기작가이기도 했다. 아내의 영향을 받은 제라시는 나이 60이 넘어 작가로서 제 2의 삶을 시작한다. 1989년 첫 장편 ‘칸토의 딜레마’를 시작으로 장편소설 5편을 냈고 1998년부터는 희곡으로 장르를 옮겨 2012년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발견의 우선권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나 과학기술의 윤리적 의미 등을 다뤘는데 이런 장르를 ‘실험실 문학(Lab li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라시가 로알드 호프만과 함께 1999년 작업한 희곡‘산소(Oxygen)’는 노벨상위원회가 만일 산소 발견으로 노벨상을 줄 경우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 공연돼 호평을 받았다. 제라시는 자신이 평생 모은 미술품과 부동산 등 재산을 미술관에 기증한다는 유산을 일찌감치 남긴 바 있다. 제라시가 스탠퍼드대 화학과를 물러날 때 학과에서 작별 파티도 해주지 않았다는 걸로 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캐릭터였던 것 같지만 사실 위대한 사람치고 인간성 좋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 아래 말처럼 그런 삶을 살다가 영면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전 사회에 단지 기술을 통해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보다는 문화적인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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