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萍草 2015. 10. 23. 13:13
    14년 귀양살이를 이겨내고 장수한 비결은 기부
    윤선도 초상화. /정지천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라는 연시조가 기억나십니까? 우리 국문학사에 빛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죠. 자연을 시로 승화시킨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선생은 시조문학의 대가이자 남인(南人)의 거두로서 노론의 송시열 선생에게 맞섰던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세 번에 걸쳐 무려 14년 7개월간이나 귀양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85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한 분 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마지막 유배는 74세에서 81세까지의 노구에 7년이나 되었지만 잘 극복해 내고 여생을 보길도에서 보냈습니다. 고산의 장수비결도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였을까? 장수한 선비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청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요약됩니다. 고산도 오랜 귀양살이를 잘 견뎌내었으니 강한 정신력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청빈하고 검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산의 집안은 전라도에서 16세기부터 지금까지 5백 년 동안 계속 이어져 내려온 대단한 부잣집입니다. 특히 1600년대 중반에 대규모의 간석지를 2곳이나 조성해 놓았는데 전남 진도군 임해면 굴포리의 백만여 평과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의 백만여 평으로서 요즘 같은 중장비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죠. 집안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으니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최상급의 음식과 약으로 건강관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장수비결에 들어갈 것으로 여겨집니다. ㆍ집안에 내려오는 적선의 힘
    그런데 첫 번째 장수비결은 적선(積善), 즉 기부를 많이 한 것을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산의 고택에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가 현판에 걸려 있는데, 인근에서 관용과 적선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집안에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말이 전해 오는데, ‘세 번이나 옥문을 열어준 적선의 집’이라는 뜻이죠. 이것은 집 주변에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지역민들이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마다 고산의 고조부인 윤효정(尹孝貞)이 세금을 대신 내줘 세 번이나 감옥에서 꺼내 줬다는 일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적선은 가훈의 핵심덕목이라 할 수 있는데,기부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편안해져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녹우당 현판 /정지천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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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직한 성격 탓에 오랜 귀양살이를 하다
    산은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8세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되었습니다. 그의 양부도 종가에 양자로 갔다가 자식이 없어 고산을 양자로 삼았으니 숙부가 양부가 된 셈이죠. 종손은 그 역할이 막중하기에 심리적 부담감이 커서 건강 장수에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2세에 양모를, 23세에 생모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26세에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생부의 건강이 위중해져 병간호를 했는데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0대의 대부분을 상복을 입고 지낸 셈이니 상당히 힘들었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17세에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부부는 53년간 고락을 같이 하다가 한 살 아래인 부인이 68세로 먼저 사망했습니다.
    삼개옥문 /정지천
    ㆍ고생스런 귀양살이는 강직한 성격 탓
    고산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14년 7개월간 여러 유배지에서 귀양살이를 겪어야 했고, 항상 많은 정적들 틈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30세의 나이에 벼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권력실세였던 이이첨의 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음 해에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양부도 아들의 상소 때문에 강원도 관찰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죄 때문에 아비의 벼슬이 떨어졌으니 그 자식의 마음은 엄청 무거웠겠죠. 고산은 먼 길을 걸어 도착한 유배지에서도 양부의 안부를 걱정했는데 외롭고 힘겨운 마음을 ‘울고 가는 기러기’로 표현한 시조를 남겼습니다. 1년 뒤에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변경됐는데, 다음 해에 양부가 사망했습니다. 다행히 인조반정이 일어나 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던 것이죠. 두 번째 귀양은 52세 때였는데 사도시 정(司導寺 正)이라는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보길도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에서 대궐로 돌아온 인조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났습니다. 74세 때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함경남도 삼수로 유배되었습니다. 삼수(三水)는 갑산(甲山)과 함께 우리나라 최북방의 추운 곳으로서 귀양지로 유명하지요. 늙은 나이에 그 곳에서 지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무려 5년이나 흘렀는데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가 전라남도 광양으로 옮겨졌습니다. ㆍ추운 지방인 삼수에 비해 남쪽의 광양은 지내기가 편했나?
    겨울을 지내기는 훨씬 나았겠죠. 그런데 광양도 흉년으로 피해를 입었고 남인의 영수인 허목(許穆)의 표현에 의하면 “남쪽 바다끝 바닷가로 풍토가 심히 나빠서 난환(難換)과 기괴한 병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하였으니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년이 지나 81세가 되어서야 왕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보길도에서 지내다 85세로 사망했습니다.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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